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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들렀던 카지노 체험 글로 쓸 결심
도박 정보·확률 매개로 한 인간사 흥미진진


"카지노 통해 양극화 사회 모순 그리고 싶었다”

당선작은 뽑혔는데 당선자의 휴대전화에서는 없는 번호라는 기계음만 냉정하게 들려왔다. 당선자 신경진씨는 응모작에 이름과 휴대전화번호만 남겨놓은 상태였다. 주소를 알아내 그가 살고 있는 아파트 관리사무소와 어렵사리 통화했지만, 그의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당선작의 테마인 ‘불확정성’을 실감나게 보여줄 작정이라도 한 것이었을까. 밤늦게 관리실의 전갈을 받고서야 어렵게 통화가 이루어진 신씨는 제3회 세계문학상 1억원 고료의 주인공이 자신이라는 사실을 믿지 못하는 눈치였다. 다음 날 오후 3시, 훤칠한 키에 마른 몸매의 신경진(38)씨가 부산에서 급히 올라와 세계일보 편집국에 나타났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미래의 불확정성에 대해 말하고 싶었습니다. 인간이라는 존재의 운명이 미리 정해져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과거를 돌이켜보면 맞아떨어지는 듯한 느낌이 올 때가 있습니다. 그 과거의 ‘운명’ 혹은 ‘확률’과 앞으로 일어날 일과의 무작위적인 충돌, 그걸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장소가 카지노가 아닐까요? 카지노를 배경으로 한국사회의 시스템이 지닌 모순에 대해서도 말하고 싶었습니다.”

당선작 ‘슬롯’(SLOT)은 컴퓨터프로그래머인 주인공이 어느날 불쑥 나타난 옛 애인의 제안으로 정선 카지노를 찾으면서 벌어지는 두 사람의 미묘한 긴장관계를 씨줄로 삼아 그곳에서 만난 인물들과 도박의 실체를 보여주는 날줄로 교직한 작품이다. 도박에 관한 다양한 정보와, 확률을 매개로 인간사를 설명하는 대목들이 시종 흥미롭게 펼쳐진다.

“가진 자는 계속해서 가지고 못 가진 자는 또 계속해서 가질 수 없는 시스템, 이른바 양극화된 그 구조가 풀릴 것 같지 않은 현실입니다. 카지노를 통해 이득을 보는 사람, 잃을 걸 뻔히 알면서 그곳에 들어가는 사람들을 통해 양극화의 숙명을 지닌 자본주의 사회의 상징적인 축도를 보았습니다.”

신씨는 2002년 친구의 권유로 우연히 정선 카지노에 갔다가 그곳에서 겪은 체험을 바탕으로 소설을 쓰겠다는 결심을 했다. 카지노 체험은 이후로도 한 달에 두어 번씩 이어졌고 아예 일주일 동안 그곳에서 머물면서 게임에 몰두하기도 했다. 그가 꾼들처럼 큰돈을 투자해 몰입한 건 아니었지만, 결국 잃기는 마찬가지였다. 신씨는 소설을 쓰기 위해 카지노에 관한 국내외 자료를 다양하게 섭렵했다. 인터넷서점 아마존에서 영문판 자료를 구입해 집중적으로 연구하기도 했다. 이렇게 축적된 자료에다 대학 시절 총학생회 간부로 활동하면서 겪었던 386세대의 과거와 현재 체험, 흘러가버린 사랑과의 해후, 인생이라는 것의 미묘한 불확정성들을 덧붙여 본격적인 카지노 소설을 탄생시킨 것이다.

1, 2회 당선자들과는 달리 신씨는 이 작품의 당선을 계기로 본격적인 소설가의 길을 걷게 된 신인이다. 고교 시절 우연히 친구가 장래 희망을 물어와 “소설을 쓰겠다”고 답한 것이 자신을 스스로 문학과 깊이 묶어버리는 계기가 됐다. 당시 그는 도스토옙스키에 심취해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막연히 이국적인 문화를 동경해오던 터에 1회 신입생을 뽑던 한국외국어대학 헝가리어과를 선택했다. 한국에서 대학을 졸업한 뒤, 지금은 고교에서 영어교사로 일하는 아내 황유희(35)씨와 함께 1998년 캐나다 유학길에 올라 4년 반 동안 영문학과 컴퓨터사이언스를 공부했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작품은 의외로 소설이 아닌 E.H 카의 ‘바쿠닌 전기’. 그는 이 밖에도 무라카미 하루키의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나 재미작가 이창래의 ‘네이티브 스피커’를 꼽았다.

“소설은 재미있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가벼운 소설에 대한 비판도 많지만 그런 소설만의 매력도 있습니다. 화장실이나 열차에서 가볍게 읽어도 좋지만, 나중에 다시 한번 생각할 여지를 주는 그런 소설을 쓰고 싶어요. 앞으로 개인의 존재가 다중과 어울리면서 느끼는 구속을 테마로 삼은 작품을 쓰고 싶습니다.”

무작위로 독과 보통 음식 중 하나를 주는 장치와 함께 고양이를 상자 안에 넣었을 때 그 고양이는 어떻게 될까? 소설 속의 여인 하나는 ‘슈뢰딩거의 고양이’ 이야기를 하면서 “현실에서 고양이는 실제로 관찰하기 전에는 살아 있는 동시에 죽어 있을 수 있는 상태인데, 카지노 안의 사람들이야말로 바로 그 고양이”라고 말한다. 주인공이 헤어진 옛 애인과 다시 만나 카지노에서 발견한 것도 “어둠의 깊이가 변하지 않는 동굴”이었다. 신씨는 “불확실한 세상에서 불확정의 미래를 맞아야 하는 모든 이들에게 미약하나마 이 작품이 위로가 되고 길잡이 역할을 했으면 좋겠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