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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과 연애 최악의 시련 겪는 잡지사 여기자
베일싸인 '닥터 레스토랑'을 취재하라는 특명에…


악마는 정말 프라다를 입을까? 여기서 말하는 악마가 대한민국 패션지 편집장이고, 프라다가 패션디자이너 ‘미우치아 프라다’를 말하는 것이라면, 대답은 NO다. 그러므로 이 문장은 이렇게 바뀌어야 한다. 악마는 프라다 짝퉁도 입는다, 라고. 직업에 대한 오래된 내 편견 중 한 가지는 이것이다. 외양이 화려해 보이는 직업일수록 월급은 형편없고, 노동 강도는 더 셀 것이라는 것.

모델, 디자이너, 포토그래퍼, 메이크업 아티스트, 언제나 다이어트 중인 요리사들과 유학파 일러스트레이터들…. 나는 이런 화려한 업종의 사람들과 일한다. 하지만 스포트라이트가 쏟아지는 바로 그 옆에 짙은 그림자가 붙어 있는 법. 그리고 환한 곳의 그늘이 원래 더 어두운 것이다. 하지만 원래 직업적 진실이란 사람들의 생각 저 멀리 있는 법이다.

7개월간의 섭외과정, 300여통의 전화, 8번이나 바뀐 스타일리스트, 홍콩과 뉴욕을 오가며 비행기로 공수한 옷 총 59벌, 경쟁지 기자의 방해공작…. 〈A〉매거진 8년차 기자인 나는 5년 만에 컴백한 영화배우 정시연의 인터뷰를 따내기 위해 고군분투 중이다.

하지만 제대로 되는 게 없다. 직장 생활 8년차. 예금도, 보험도, 그 흔한 펀드에 애인 하나 없다. 영화배우도, 레스토랑 섭외도 엉망이라 하루에도 사표를 몇 번씩 쓰다 지운다. 이해받고 싶었던 남자에겐 오해를 사고, 오해하든 말든 상관없던 남자와는 이상한 이해관계에 얽매인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 같은 유치한 속담은 왜 이렇게 잘 맞아떨어지는지 모르겠다.

마감 탓에 나흘 만에 들어간 집에선 설상가상 칼자국 같은 주름을 본다. 이것이 바로 천하의 명의도 못 고친다는 표정 주름인가! 바람 부는 날엔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더니, 나는 압구정동 성형외과에 가야 할 판이다.

내 나이 서른 한 살, 30퍼센트 세일하는 옥돌매트가 필요한 나이다. 쓸쓸하다.

대한민국에서 기자로 사는 것의 비루함이 목구멍에 치밀던 어느 날, 편집장의 특명이 떨어진다. 〈A〉매거진 최고의 요리 칼럼니스트 ‘닥터 레스토랑’을 창간호 특집 기사로 취재하라는 것. 닥터 레스토랑. 음식칼럼 하나로 유명 레스토랑들을 초토화시킨 이 비밀스런 요리평론가를 인터뷰해 달라는 독자들의 요구가 빗발칠수록 점점 조급해진다. 하지만 내가 알고 있는 단서는 단 하나, 메일 주소. 그것도 매번 바뀐다. 나는 아직 닥터 레스토랑의 이름은커녕, 나이도, 주소도, 성별조차 알지 못한다.

‘평범한 여자의 관점 따윈 필요하지 않다’고 외치는 편집장과 ‘남자와 여자 모두를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진화된 종족’이라 주장하는 후배 틈 사이에서 나는 내 정체성과 사랑을 온전히 지켜낼 수 있을까. 키가 작으면 하이힐을 신고, 피부에 자신이 없으면 화장을 하라는 빅토리아 베컴의 말에 기꺼이 한 표 던지겠다고 냉소적으로 말하는 속물들의 자기 진실은 과연 무엇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