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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황 거듭하며 나아갈 길 찾는 두 여성
이별과 상처 겪으며 자기만의 빛 구축

종교·철학적 개념으로 시간 확장시켜
트렌드라는 힘 가장 전면적으로 전복


세상사가 궁금한 많은 사람들은 ‘트렌드 2024’를 본다. 그러나 세상사의 핵심에는 인간이 있고, 인간 본성에는 불행인지 다행인지 트렌드가 없다. 오직 모순과 갈등, 대립과 역설에 대한 발견만이 있을 뿐. 소설의 핵심에 인간이 있는 이상 소설에도 역시 트렌드 따위는 없다고 해야 할 것이다. 없을 뿐만 아니라, 트렌드를 훼방하는 것이야말로 소설의 욕망이다. 세상사의 ‘훼방꾼’들과 만나는 일에는 감동과 쾌감이 있다. 트렌드 역시 힘이기 때문이다.

본심작 6편 중 집중적으로 논의한 작품은 ‘매미 소리’, ‘꿈을 꾸는 황무지’, ‘나의 표준 감정 진단서’, ‘김섬과 박혜람’이다. ‘매미 소리’는 노년의 여성이 반려견과 함께 살아가는 와중에 깨닫게 되는 관계와 인생의 진리를 소박하게 전개하는 가족 서사다. 단정하면서도 안정적인 문체와 삶에 대한 통찰이 때때로 울림을 준다. 그러나 상투성을 전복하지 못하는 노년의 캐릭터와 낯선 틈으로 탈주하지 않는 익숙한 세계의 반복은 ‘새로움’을 향한 독자들의 열망을 충족시키기에 부족해 보였다.

인하대 명예교수인 최원식 심사위원장(왼쪽 세번째)을 비롯해 7명의 심사위원들이 지난달 19일 오후 서울 용산 세계일보 대강당에서 제20회 세계문학상 본심 심사 도중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진 왼쪽부터 정유정, 박혜진 심사위원, 최 위원장, 은희경, 정홍수, 하성란, 전성태 심사위원.


또 한 편의 가족 서사가 ‘꿈을 꾸는 황무지’다. 분단이라는 질곡의 역사 속에서 성악가로서의 꿈을 놓지 않았던 한 남성의 비밀스러운 삶이 그의 아들에 의해 서서히 드러나는 작품이다. 문학적 공간으로 발굴된 철원을 배경으로 개인과 역사, 꿈과 현실, 현재와 미래, 기억과 망각 등이 대립하는 가운데 만들어 내는 운명의 화음이 인상적이다. 그러나 아들의 이야기와 아버지의 이야기가 상호작용하지 못하는 데에서 오는 분리와 단절이 못내 아쉬웠다. 교향곡을 연주할 수 있는 몸으로 단조로운 노래만 부르는 사람을 볼 때의 서운함이라 해도 좋겠다.

수상작을 놓고 끝까지 고심한 작품은 ‘나의 표준 감정 진단서’와 ‘김섬과 박혜람’이다.

‘나의 표준 감정 진단서’는 감정을 데이터화할 수 있는 미래의 어느 시점을 배경으로 ‘표준 감정’ 안에 있는 사람과 ‘표준 감정’ 밖으로 밀려난 사람들의 왜곡된 실존을 비판적 시각으로 바라본다. 인공지능시대의 ‘1984’를 떠올리게 하는 이 소설은 감정을 통한 전체주의를 경고하는 동시에 감정에 의한 신분사회를 미리 고발한다. 그러나 기본 설정을 설명하는 데 지나치게 많은 비중을 할애하는 나머지 소설적 흥미가 반감된다. 설정을 장악하지 못하는 데에서 오는 서사적 머뭇거림이 설득력 있는 작품 대신 설득이 필요한 작품으로 만든 형국이었다.

‘김섬과 박혜람’은 사랑이라는 자발적 밀폐의 장소에서 고립돼 버린 외로운 자들이 방황을 거듭하며 자기 인생의 행로를 찾아가는 과정을 그린다. 오랜 친구이자 룸메이트였던 두 여성 김섬과 박혜람은 각자 사랑과 이별, 공포와 상처를 겪으며 “커다란 바위의 안쪽 같은 어둠”을 경험하지만 종국에는 “기억과 재생”의 경로를 통과하며 자기만의 빛을 만들어 나간다.

익숙한 자아찾기일 수도 있었을 이 소설을 특별하게 하는 것은 시간의 미학적 운용이다. 소설에서 시간성은 과거와 현재를 절묘하고 유려하게 오가며 인물 내면의 모순과 갈등을 깊이 있게 구축할 뿐 아니라 종교적, 철학적 개념으로 확장되는 시간은 신중하면서도 친근하게 명상적 분위기를 자아낸다. 이는 독자들을 금세 인간학과 사랑론의 연구자로 만든다.

전혀 다른 경험을 제공하는 두 작품을 두고 논의를 거듭한 끝에 트렌드라는 힘을 가장 전면적으로 전복하며 인간 본성에의 연구에 동참케 하는 ‘김섬과 박해람’을 올해 세계문학상 수상작으로 결정했다. 수상자에게 축하와 기대가 함께하는 인사를 전한다./p>

심사위원 : 최원식·박혜진·은희경·전성태·정유정·정홍수·하성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