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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심에서 논의의 대상이 된 작품은 김이누의 ‘몽이의 블루헤어에 갇힌 새’와 금현의 ‘이봐, 바람개비가 돌고 있잖아’, 그리고 김별아의 ‘미실’ 세 편이었다. 가독성이 뛰어난 것은 ‘몽이의 블루헤어에 갇힌 새’였다.
존재론적 정체성을 잃고 무국적자로 위태롭게 살다가 파멸에 이르는 한 여자의 이야기를 고백체로 담아내고 있는 ‘몽이의 블루헤어에 갇힌 새’는 잘 읽힐 뿐 아니라 과거와 현재를 기능적으로 얽어짠 솜씨가 좋았으나 지나치게 고양된 영탄조의 문체, 생모의 갑작스러운 출현 등이 보여주는 작위성, 붉은 단추의 상징화 미숙, 결말의 안이성 등이 지적되어 당선권에서 제외됐다.
남은 두 작품 ‘이봐, 바람개비가 돌고 있잖아’와 ‘미실’은 여러 면에서 대조적인 소설 문법을 보여주고 있어 장시간 토론이 이어졌다.
‘이봐…’는 짧고 세련된 문체와 현실·가상 공간을 넘나들다가 점층적으로 결말에 이르는 모던한 소설 기법 등은 좋았으나 전반적으로 서사의 볼륨이 빈약하다는 점과 지나치게 대화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 주제의식이 불분명하여 공소하게 느껴진다는 점이 단점으로 지적됐다.
‘미실’은 그와 달리 ‘화랑세기’에 기록된 역사 속 인물을 독특하고 뚜렷한 새로운 유형의 캐릭터로 진지하게 형상화해냈다는 점에서 호감을 샀다. 물론 역사의 기록을 소설적 상황으로 재구성해내는 데 필연적으로 따르는 창조적인 관점이 미흡하다든가, 지나치게 비현실적인 서술 때문에 로맨스적 구조에 가깝다든가, 결말부에서 상투적인 계몽성을 드러냈다든가 하는 점들이 지적됐으나, 작가의 탐구심이 돋보이는 문장과 호방하게 밀고 나가는 서사력과 새로운 유형의 캐릭터를 응축해놓은 솜씨 등에 비해서는 부분적인 결함이라는 데 심사위원들의 견해가 대부분 일치했다. 무엇보다 신라의 여인 ‘미실’을 왜 오늘의 우리가 다시 만나야 하는지, 작가가 명백한 대답을 갖고 있는 듯 보여 마음 든든했다.
이제 우리는 새로운 ‘스타작가’의 탄생을 보게 되었다. 내면화 경향이라고 요약되는 1990년대식 협소한 소설 문법을 밀어내면서 호방하고 장대한 서사를 담아내는 로맨스적 구조의 소설들이 최근 다투어 등장하고 있다. ‘미실’은 그런 상황에서 선도적 역할을 능히 감당해내리라고 믿는다. 새로운 서사의 시대가 열리기를 바란다.

본심에 오른 세 편의 작품 중 ‘몽이의 블루 헤어에 갇힌 새’는 스토리 텔링 면에서 가장 재미있게 읽힌 작품이다. 그러나 보다 명료하게 형상화되어야 할 인물의 개성, 장편 분량에 걸맞은 서사, 제대로 된 한판 갈등 등이 확보되지 못한 점이 아쉬웠다. 불필요하게 냉소적인 말투와 화자인 18세 소녀의 언행으로 볼 수 없는 대목이 자주 드러나는 점도 거슬렸다.
‘이봐, 바람개비가 돌고 있잖아’는 오랜 연마 과정을 거쳐 뽑아낸 정제된 형태의 작품이라는 인상을 주었다. 문체의 개성이 확보되어 있고 지문이나 대사의 재기발랄함도 눈길을 끌었다. 그럼에도 언젠가 어디선가 만난 듯한 상투성, 설익은 사유의 아마추어리즘 등이 독서를 방해하곤 했다. 무엇보다도 단편 규모의 빈약한 서사를 너무 큰 그릇에 담은 듯 허전한 뒷맛이 남는다.
‘미실’은 장편이라는 장르적 규범에 가장 충실하며 또한 프로페셔널한 작품이다. 쓰고자 하는 대상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는 점, 역사 소설을 쓸 때 필요한 기초 지식을 잘 확보하고 있는 점, 역사적 사실 위에서 펼치는 상상력의 전개가 거침없다는 점, 장편에 걸맞은 서사의 부피를 확보하고 있는 점, 그 모든 것을 이끌어 나가는 문체의 숙련성 등이 두루 믿을 만했다. 특히 이 소설의 매력은 신라 여인 ‘미실’을 통해 그동안 예술 영역에서 만나지 못했던 새로운 여성을 그려냈다는 점이다.
‘미실’은 데미테르 같은 모성의 여성도 아니고, 팜 파탈인 치명적 매혹의 여성도 아니다. 남성에게 의존하거나 남성의 성적 대상으로 존재하는 여성 또한 아니다. ‘미실’은 여성을 통제하는 제도가 만들어지기 전, 성 모럴이 정립되기 전, 남녀가 가장 자연스러운 생물학적 인간으로 존재하던 시기의 여성이며 이 소설은 그런 여성을 잘 형상화하고 있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역사적 사실에 지나치게 충실해 구성의 묘를 발휘하지 못한 점, 역사 지식을 되도록 많이 담으려는 욕심 때문에 불필요한 의고적 표현이 눈에 띈다는 점이다.
2004년 5월, 1억원 고료 장편소설을 공모하는 제1회 ‘세계문학상’을 고지한 뒤 지난해 12월30일 최종 마감한 결과 모두 139편이 응모했다. 통상적인 장편문학상 응모작 수의 배에 이르는 양이었다. 이후 약 한달 여에 걸친 본격적인 심사 장정에 들어갔다. 응모 열기가 뜨거웠던 만큼이나 기존의 심사 방식에서 진일보한 최선의 방법을 강구하기 위해 주최 측은 고심을 거듭했다.
우선 심사위원을 국내 문학상 심사 사상 가장 많은 9명으로 구성했다. 예심위원들이 초기 단계부터 열심히 작품을 읽고 최종후보작을 압축해놓은 뒤에는 손을 놓고 본심위원들 몇 명의 심사 결과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던 통상적인 심사 방식을 바꾸어, 예심위원들도 마지막 결정 과정까지 참여하기로 했다. 이 방식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한국 문단의 대선배들이 흔쾌히 젊은 후배들과 심사를 함께하는 ‘기득권’ 양보가 필수적인 전제였다. 다행히도 그들은 이 과정을 두말없이 받아들였다. 그 결과 성석제 김형경 하응백 서영채 김미현 김연수에 이르는 6명의 청장년층 심사위원이 구성됐고, 노년층에서는 김윤식 김원일 박범신씨 등 3명이 참여했다.
2005년 1월 26일 오후 5시 세계일보 편집국 대회의실. 최종 후보작 ‘이봐, 바람개비가 돌고 있잖아’ ‘미실’ ‘몽이의 블루 헤어에 갇힌 새’ 등 3편을 놓고 한 시간여에 걸친 토론이 이어졌다. 어느 한 작품으로 의견이 일치되지 않았다. 현 단계 한국 소설의 경향에 대한 평가가 오고간 뒤 심사위원들은 무기명 비밀투표를 하기로 합의했다.
1차 투표 결과, 각 작품은 위에 언급한 순서대로 4:3:2의 표를 얻었다. 어느 한 작품이 과반의 표를 확보하지 못할 경우 상위 두 작품을 놓고 결선투표를 하기로 한 심사위원들의 사전 약속에 따라 2차 투표에 들어갔고, 5:4의 결과로 ‘미실’이 극적인 당선의 영예를 안았다.
수의 논리가 늘 정답으로 귀결되는 것은 아니지만 절대적인 점수를 매기기 어려운 문학작품을 심사하는 과정에서 특별한 왕도는 없다. 당선자에게는 축하를, 아쉽게 문턱에서 좌절한 응모자에게는 따뜻한 위로를 보낸다. 아울러 지난해 내내 계절과 밤낮을 잊고 작품 집필에 몰두했던 많은 응모자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