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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축구를 좋아한다. 그녀도 축구를 좋아했다.
나는 그녀를 사랑했다. 그녀도 나를 사랑했다.
나는 그녀만을 사랑했다. 그녀는 나도 사랑했다.
나는 그녀가 나만을 사랑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이 나만을 사랑하게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녀는 ‘지금 이대로’가 좋다고 말했다. 자기 한 몸만 건사하면 되는 ‘지금’, 자유롭게 여러 남자들을 만나도 괜찮은 ‘이대로’.
나는 결혼 후에도 ‘지금’처럼, ‘이대로’ 살 수 있도록 하겠다며 약속을 남발해댔고 집요한 설득 끝에 결국 그녀와 결혼할 수 있었다.

결혼 생활은 행복했다. 아내가 폭탄선언을 하기 전까지는.
아내가 말했다. 다른 남자가 있다고. 그와 결혼하고 싶다고.
아내는 또 말했다. 여전히 나를 사랑한다고. 헤어지는 것을 원치 않는다고.
내 인생의 비극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내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이다. 전부를 가질 수 없다면 반이라도 갖겠다는 영화 대사가 내 삶이 되어버렸다. 아내가 결혼했다. 도무지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될 일이지만 아내는 그렇게 해버렸다.
인생은, 마치 축구처럼, 때로는 뻘밭에서 뒹굴어야 할 때도 있다. 아내의 두 번째 결혼은 내 인생을 뻘밭으로 만들어 놓았다.

아내의 남편은 두 사람. 두 남자가 아내를 공유하는 기묘한 스리섬 게임. 아내와 아내의 두 번째 남편은 그것이 그저 일반적인 결혼과는 ‘다른’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내 생각에 그것은 명백히 ‘틀린’ 것이었다. 아내를 처음 만난 후 내 인생의 목표는 그녀를 독점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이제 불가능해졌다. 나는 그 기묘한 관계에서 발을 빼기로 마음먹었다.
하필 그 즈음에 아내는 임신했다. 만일 내 아이라면? 아내를 온전히 독점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 하지만 아내에게는 아이의 아버지가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딸아이가 태어나자 아내가 말했다. “이 아이는 내 아이야.”

아내의 또 하나의 남편은 아내를 돕는다는 명목으로 조금씩 내 생활 속으로 들어왔다. 그는 아내를 사랑했다. 그리고 또 그는 (나를 훨씬 더 많이 닮은) 딸아이도 끔찍하게 사랑했다. 그의 헌신은 내 칼날을 무디게 만들었다. 그의 집안에 알려서라도 아내 옆에서 그를 떼어내려고 계획했지만 결국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조마조마한 나날들. 행여 누군가 우리의 속사정을 알면 어떻게 하나. 그것만이 그를 떼어내는 가장 유력한 길임에도 불구하고, 그런 일이 생기기를 간절히 바라면서도, 그런 일이 생길까봐 노심초사하게 되는 그야말로 이상야릇한 나날들이 흘러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