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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리아모리와 축구의 절묘한 만남
많은 경쟁작을 물리치고 본심에 오른 4편의 장편소설을 읽었다. 소설에 있어서 장편 장르를 음악에 비유하면 가곡이나 소네트 형식이 아닌, 교향곡이다. 그만큼 생산(창작)이 용의치 않아 한 작가가 일생을 통틀어 10편 남기기가 힘들다. 그런 측면에서 4편의 소설을 읽으며, 혼신을 바쳐 부단히 정진해온 작가의 노고를 읽을 수 있었다.
‘야우야, 야메’는 신화적 상상력으로 여성의 관점에서 본 인류 발전사를 서술하고 있다. 신성과 속성이 교차하는 스케일 큰 서사가 전편을 압도한다. 공부를 많이 한 흔적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합심 평에서 전반적으로 지적되었다시피, 가독성이 떨어진다는 약점이 치명적이었다. 이는 주인공 아쉬디가 이끌어 가는 스토리의 전개가 상호 보완, 일관된 연속성을 소홀히 함으로써 작가가 전달하고자 하는 주제가 모호한 데 원인이 있지 않나 싶다.
‘수용소열도’는 우리 근대사 중심에 위치한 한국전쟁, 그 중에서도 많은 문제점을 야기한 거제도포로수용소의 실태를 정면으로 다루었다는 점에서 우선 주목할 만하다. 한정된 공간 안에 좌우익을 섞고 거기에 중공군 포로까지 17만명 포로를 수용한 당시 수용소와, 철조망 밖 피란민과 현지 주민과의 마찰은 그 자체가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이를 세밀한 고증을 거쳐 정면으로 승부한 작가정신을 높이 샀다. 그러나 평범한 문장, 사태를 보는 관점의 보수성, 작가의 주관적 개입 등 너무 진부한 방법으로 사건을 접근하지 않았느냐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캐비닛’은 끝까지 토론 대상이 된 잘 쓴 소설이다. 다른 말로, 신인다운 패기가 넘치고, 그만큼 문학성이 있다. 지식 박물학적 접근, 초현실주의적 환상성을 매개로 보르헤스의 소설을 읽는 느낌을 준다. 캐비닛 속의 파일을 분석해 내며 소설쓰기의 어려움을 토로하는 발상법도 기발하고, 전편에 넘치는 독특한 활력이 매력적이다. 시종 좋은 신인을 발굴했다는 느낌으로 읽었다. 일관성 부재에 따른 단절감, 가독성의 장애로 난해한 전개가 문제로 지적되었다.
‘아내가 결혼했다’는 우선 내용이 도발적이다. 폴리아모리((polyamory·비독점적 다자연애)의 결혼관을 밀고 나간 작가의 배짱이 여간 아니다. 아내가 이중결혼을 한다는 ‘외도의 부적절한 관계’를 나의 관점에서 시종 끌고 나가다 보니 단조로운 구성에도 불구하고 단숨에 읽히는 매력이 장점이다. 이 단조로움을 극복하는 방법으로 축구 경기의 묘미를 틈새로 끼워넣어 활력을 보탠다. 오늘의 보편적인 윤리적 측면에서 말이 안 된다는 점잖은(?) 의견도 있었으나, 오히려 이 점이 이 작품 매력의 핵심이란 의견도 있었다. 이 작품이 발표된다면 문단 안팎의 찬반 여론도 따르리라 본다.
심사위원 9명은 장시간 토론 끝에 ‘아내가 결혼했다’의 새로움, 경쾌함, 문장의 밀도 등 이 소설의 매력에 후한 점수를 주었다. 낙선한 세 분의 분발을 기대하며, 당선자를 축하한다.


소설은 새로워야 한다. 시대와 인간이 변하면 소설도 변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2차 예심 통과작 7편 중에서 ‘개와 늑대의 시간’과 ‘달의 제국’이 제외되었다. 전자는 한 여성의 성장통을 안정적으로 서술하고 있으나 기존의 여성성장소설이 이룬 성과를 넘어서지 못했다. 후자는 발해 3대 문왕의 도의비사(圖義秘事)를 둘러싼 음모를 그리고 있으나 요즘 유행인 팩션류의 소설이어서 기시감이 앞섰다. ‘도망치는 자의 노래’ 또한 보편적 주제를 박물관 관련 디테일로 새롭게 포장했지만 인물의 성격이나 행동의 동기 부여가 부족하고 시간의 교차 서술이 비효율적이었다.
위 3편을 제외한 4편이 본심에 올랐다. 그 중 거제도 포로수용소를 배경으로 이데올로기의 대립 속에서 갈등을 일으키는 인간의 본질적 삶을 다룬 ‘수용소열도’ 또한 역사적 고증에 품을 많이 들인 ‘웰 메이드’ 계열의 소설이었으나 ‘낡은’ 소설이라는 한계가 너무 컸다. 유방으로 상징되는 여성성의 소멸 과정을 여성 신화적 입장에서 그린 ‘야우야, 야메’ 또한 여성성에 대한 도식적 이해와 기계적인 구성, 현학적 서술이 가독성을 많이 떨어뜨렸기에 제외되었다.
마지막까지 ‘캐비닛’과 ‘아내가 결혼했다’가 접전을 벌였다. ‘캐비닛’은 문명비판적인 인간주의를 SF적 상상력을 통해 환상이 아닌 현실 자체로 전달하려는 작품이다. 그러나 열거 중심의 평면적 구성, 에피소드들의 식상함, 자기세계로의 지나친 몰입 등이 한계로 지적되었다.
‘아내가 결혼했다’는 다른 남자와 중혼(重婚)하는 것을 허용해야 하는 남편의 심리를 축구의 세계와 연관시켜 재치 있게 서술하고 있는 ‘쾌작’이다. 심사위원들은 ‘아내가 결혼했다’가 지닌 소설의 유희화·경박화에 대한 비판이나 우려를 무릅쓰고 당선작으로 결정했다. 이것이 과연 ‘소설의 종언’인지 아니면 또다른 ‘소설의 시작’인지, 신소설로의 ‘퇴행’인지 아니면 미래 소설로의 ‘진화’인지는 독자들이 판단할 몫이다.
2005년 5월, 1억원 고료 장편소설을 공모하는 제2회 ‘세계문학상’을 고지한 뒤 12월 23일 최종 마감한 결과 모두 107편이 응모됐다. 첫 회에 비해서는 30여편 정도 줄어든 규모지만, 통상적인 장편공모 응모작 수에 비해 여전히 뜨거운 열기를 보인 셈이다. 대부분 첫 회에는 여기저기 문학상을 떠돌던 응모작들이 한꺼번에 ‘수합되는’ 관행임을 감안하면, 세계문학상이 2회로 접어들면서 신작 중심으로 재편된 결과로 분석된다.
심사는 1회 때와 마찬가지로 2차 예심과 예·본심 위원이 함께 참여하는 최종심 등 3차에 걸쳐 진행됐다. 심사위원은 연속성을 감안하여 전년과 동일하게 구성했다. 특히 보다 공정하고 치밀한 심사를 위해 이번에는 2차 예심의 경우 6명의 예심위원이 충남 덕산온천에서 1박2일 동안 합숙하며 장시간의 토론을 벌였다. 1차 예심에서 각 예심위원들이 뽑은 작품들을 미리 돌려 읽어본 뒤 마련한 합숙 심사에서는 밤늦은 시간까지 치열한 토론이 이루어졌다. 1차 예심에서 올라온 7편의 작품 중 4편이 선정됐고, 이 최종후보작들을 본심위원에게 송부하여 다시 10여 일에 걸친 장고에 들어갔다.
지난 1월 24일 서울 프레스센터 19층 석류실. 심사위원 9명이 마지막 당선작을 가리기 위해 모였다. 이들은 한 시간여에 걸쳐 각자의 의견을 개진한 뒤 자유토론을 벌였다. 윤곽이 어느 정도 드러나기는 했지만, 국내 최대 규모 9명의 심사위원단이 어느 한 작품을 만장일치로 선정하기는 어려웠다. 결국 지난해처럼 무기명 비밀투표에 들어갔다. 과반수인 5표를 확보한 작품이 나오기 전까지는 가장 적은 표를 받은 작품을 제외하고 재투표를 반복하기로 사전 약속했다. 지난해 재투표 끝에 극적으로 선정된 ‘미실’의 경우를 떠올리며 긴장된 분위기 속에 투표에 돌입했다. 하지만 ‘아내가 결혼했다’가 1차 투표에서 간단히 과반을 넘기며 6표를 확보함으로써 당선작은 의외로 쉽게 결정됐다. 당선자에게는 축하의 인사를, 응모해주신 모든 분께 위로와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