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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박에 기대 도박을 불신하는 도둑 같은 소설"

많은 응모작 중에서 최종적으로 토론 대상이 된 작품은 ‘침묵의 소리’, ‘노예, 틈입자, 파괴자’, ‘슬롯’ 세 편이었다.
‘침묵의 소리’는 비극적인 분단 상황을 날줄로 삼고 추리적 기법을 원용한 드라마틱한 서사를 씨줄로 삼은 작품으로서 서사의 실종이 지적되고 있는 한국문학의 오늘을 두고 볼 때, ‘이야기’를 되살려내고자 했다는 점에서 심사위원들의 호의적 반응을 얻었다. 그러나 ‘이야기’에 대한 욕구가 너무 지나쳐서 개연성이 부족한 대목도 눈에 띄었고, 문체 또한 진부하고 고루한 느낌을 주었으며, 무엇보다도 전체적으로 내면화에 실패함으로써 시대를 뛰어넘은 인간 본질의 보편성과 형식 안에서의 소설미학을 확보하는 데까지 나아가지 못했다는 점이 깊이 있게 지적됐다.

남은 두 편, ‘노예, 틈입자, 파괴자’와 ‘슬롯’을 놓고 심사위원들 사이에 매우 치열한 논의가 벌어졌다. 소재와 주제는 물론이고 말하기 방식에 이르기까지 대조적인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노예, 틈입자, 파괴자’는 유려한 문체와 세련된 접근법, 그리고 도저한 문학적 야심이 느껴지는 작품이라는 데 이의가 없었다. 소설미학에 대한 기본적 감수성이 잘 닦여 있다고 보았고, 형식에 대한 실험의욕은 높이 살 만했으나, 가독성이 문제였다. 작가의 지나친 야심이 오히려 독자와의 소통을 어렵게 만드는 인위적 장치처럼 작용했고, 문장은 너무 현란해서 때로 유희적, 현학적으로 느껴졌을 뿐 아니라 과도한 장치와 알레고리에 비해 주제에의 집중도가 떨어져서 공소함을 면할 수 없다는 점이 이 작품의 큰 문제였다.

‘슬롯’은 그것에 비해 잘 읽힌다는 가독성이 장점이었다. 더러 형식 안에서의 절제가 부족하다거나 오문이 있다는 지적이 있었으나 감상에 특별히 빠지지 않고 허장성세로 목청을 높이지도 않으면서 모든 것이 불확실한 현대인의 내면세계를 비교적 차분히 그려냈다는 점엔 특별히 이의가 없었다. 다 읽고 나면 정체성의 상실로 가파른 자본주의적 경쟁의 바다에서 엉거주춤 부유하고 있는 존재의 아릿한 슬픔을 만날 수 있다는 것 또한 이 작품의 장점이라 할 만했다.

작가의 정진을 기대한다.



재미·디테일·긴장감 살아있는 가독성 장점

소설은 새로운 질문을 던져야 한다. 그런 면에서 본심에 올라온 3편 중에서 ‘침묵의 소리’가 제일 먼저 제외되었다. 이 소설이 제기하고 있는 질문에 깊이가 없어서가 아니다. 오히려 국가 이데올로기의 폭력성이 어떻게 ‘국민’이라는 ‘노예’를 생산해내는지를 납북 및 탈북의 과정을 통해 그리고 있는 진지한 소설이다. 문장도 안정되어 있고 디테일에 공을 들인 흔적이 역력하다. 그러나 이 소설만의 개성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다큐멘터리 같은 평면적 구성이나 계몽적인 서술, 추리소설적 기법이나 상황 설정의 작위성이 소설적 매혹을 더욱 경감시켰다.
소설은 다양한 스펙트럼을 보여주어야 한다. ‘노예, 틈입자, 파괴자’는 신선하고도 지적인 실험소설이다. 자신의 이야기를 뚝심 있게 끌어나가는 문학적 패기나 오기도 만만찮다. 그러나 언어가 더 이상 소통의 도구로 작용하지 못하는 새로운 바벨탑의 시대를 문제 삼는 형식 자체에 너무 과부하가 걸려 가독성이 떨어지는 소설이 되고 말았다. 현학적 태도에 빠지다 보니 읽어내려 갈수록 공소해지기도 한다. 읽기 어려운 소설이라고 해서 깊이가 담보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소설은 살아있어야 한다. 당선작으로 결정된 ‘슬롯’은 도박과 여자에 관한 소설이다. 이런 대중적인 소재가 가질 수 있는 위험을 현명하게 비켜간 작가의 진정성이나 역량에 우선 신뢰가 갔다. 물론 다양한 도박들에 관한 역사를 정보 소설적 인용으로 전달하는 형식이 상투적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그로 인해 소설을 읽는 재미가 배가되고, 소설의 디테일이 살아났다.

무엇보다도 도박이 또 다른 일상세계에 불과하다는 것, 그래서 도박을 통해서도 인생의 불확정성이나 지루한 반복을 피할 수 없다는 것에 이르는 통찰이 신선하다. 도박에 기대면서 도박을 불신하는 도둑 같은 이 소설에 긴장감을 느끼게 된다. 이 긴장감이 이 소설을 생물로 만들고 있다.

164편 응모작 중 3편 최종 압축… 무기명투표…'슬롯'!

지난해 5월 제3회 세계문학상 공모요강을 고지한 뒤 12월23일 마감한 결과 모두 164편이 접수됐다. 장편소설을 공모하는 역대 한국의 문학상 사상 가장 많은 응모작 기록을 세운 뜨거운 열기였다. 심사위원단은 지난해와 마찬가지로 세계문학상만의 독특한 구성인 노·장·청 9명으로 꾸렸다.
지난해 12월 26일, 1차 예심위원 6명에게 응모작들을 배분한 뒤 다음날 예심위원단이 한자리에 모여 심사 일정과 방법들에 관해 숙의했다. 올해 1월 8일, 예심위원들이 각 1편 이상 선정한 1차예심 통과작으로 ‘9시 17분’ ‘그리스도와 간음한 여인’ ‘침묵의 소리’ ‘슬롯’(SLOT) ‘최후의 인간’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 ‘물고기의 눈’ ‘노예, 틈입자, 파괴자’ 등 모두 8편이 가려졌다. 2차 예심은 1월15일 수도권의 한 호텔에서 1박2일 동안 합숙으로 진행했다. 이 자리에서 열띤 토론을 거친 끝에 최종심에 올릴 ‘침묵의 소리’ ‘슬롯’(SLOT) ‘노예, 틈입자, 파괴자’ 등 3편을 선정했다.

최종심 후보작 3편은 원로 심사위원단에 넘겨졌다. 마지막 최종심은 1월 25일 오후 5시 서울 태평로 한국프레스센터 19층 석류룸에서 열렸다. 이 자리에는 예심을 맡았던 소장 심사위원 6명과 원로 심사위원 2명이 참가했다.

최종심에서는 1시간여 동안 각 심사위원들의 후보작에 대한 의견 개진에 이어 전체 토론을 한 뒤 마지막 무기명 투표에 들어갔다. 그 결과 ‘슬롯’과 ‘노예…’가 각 7표와 2표를 얻어 최종 당선작으로 확정됐다.

응모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