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계 캐나다인 주부 내면 다룬 ‘로야’/치밀한 문장·긴장감 있는 서사 빼어나
바야흐로 이야기의 시대다. 넷플릭스가 영화산업의 소비 구조를 근본적으로 바꾸고 있는 지금, 이야기는 다양한 매체를 통해 봇물 터진 듯 흘러넘치고 있다. 그렇다면 풍요로운 이야기의 시대에 소설은 저물고 있다 말해야 할까. 오히려 반대다. 2019년 세계문학상 응모작들 안에 그 답이 있었다. 올해 응모된 작품들 중에는 소설의 육체인 문장에 개성을 부여하고 소설적 상상력을 거침없이 추구하는 작품들이 눈에 띄었다. 영화적 상상력과 영상 중심의 글쓰기가 대세를 이루었던 지난 시절의 흐름에서 한발 뒤로 물러나 소설만의 경로를 탐색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는 변화였다. 예심을 통과한 10편의 작품 중 심사위원들이 주목한 작품은 ‘로야’ ‘더티 스트리트’ ‘풀의 여름’ ‘구디 얀다르크’ ‘아레시올 호르몬’이었다. ‘아레시올 호르몬’은 인간의 공격성을 제어하는 호르몬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스릴러물이다. 안정적인 스토리텔링이 장점이었지만 짜 맞춰진 인과와 로맨스로 마무리되는 결말이 신파적이라는 평가를 면하기 어려웠다. ‘구디 얀다르크’는 구로 디지털단지의 잔다르크라는 모티프가 매력적인 작품이었다. 소설적 구성에 대한 고민이 보다 깊었다면 직장인의 애환을 그린 핍진한 묘사가 더 빛을 발했을 것이다. ‘풀의 여름’은 화자의 내레이션이 무척 인상적인 작품이었다. 하지만 전반부 택배 노동 중심의 사실주의적 형식과 후반부 납치극 중심의 누아르적 형식이 다분히 이질적이었다. 장르 간 이종교배는 혼합물이 아니라 화합물이 되어야 한다. 제3의 형식을 만들어낼 때 결합은 비로소 새로운 시도가 된다.
15회 세계문학상 심사위원들은 응모작들에 대해 “문장의 개성이 강하고, 소설적 상상력이 뛰어났다”며 “당선작이 한국문학의 저변을 넓히길 기대한다”고 밝혔다. 왼쪽부터 강영숙, 방현석, 김별아, 최원식, 정홍수, 은희경, 박혜진. 집중적으로 논의한 작품은 ‘로야’와 ‘더티 스트리트’였다. ‘더티 스트리트’는 어느 날 할아버지의 유골함을 되찾게 된 손자가 미스터리하게 살다 간 할아버지의 일대기를 추적하는 소설이다. 생체실험 피해자였던 할아버지로 인해 ‘미친 유전자’로 연결된 비루한 삼대의 이야기 아래 개인과 역사의 관계, 소설에 대한 질문까지 품고 있는 중층적 구성이 문학적 상상력을 거침없이 밀고 나갔다. 그러나 산만한 전개가 가독성을 견인하지 못했고 사실관계에 대한 디테일에도 끝내 아쉬움이 남았다. ‘로야’는 캐나다 밴쿠버를 배경으로 중산층의 삶을 영위하고 있는 한국계 캐나다인 주부의 내면을 다룬 심리소설이다. 아이를 빈틈없이 돌보고 가사를 완벽하게 책임지는 주인공의 엄격하고 품위 있는 생활은 일견 완벽한 ‘정상 가족’의 그것이지만 일찍이 부모와의 관계에서 비롯된 불화의 기억은 그녀의 내면을 불안 상태에 못 박아 둔다. 한 문장도 건너뛸 수 없게 만드는 치밀한 문장과 심리적 현실을 재현하는 긴장감 있는 서사가 언어예술로서의 소설을 증명해 보이는 작품이다. 심사위원들은 ‘로야’를 당선작으로 택했다. 경미한 교통사고 이후 발현된 것은 예상 가능한 사고 후유증이 아니라 불가해한 삶의 후유증이었다. 후유증으로서의 불안과 강박은 가족 서사와 여성 서사, 나아가 피해자 서사의 진폭을 넓혀 주는 전기를 마련할 것이다. 더욱이 이번 수상자는 소설의 화자처럼 한국에서 태어나고 성장해 밴쿠버에 살고 있는 여성이다. 오랜 시간 동안 세계 곳곳에서 출발한 수많은 응모작 가운데 드디어 한 작품이 한국문학의 땅에 깃발을 꽂았다. 세계문학상 15회 만에 거둔 또 하나의 성과가 한국문학의 저변을 넓히는 새로운 가능성이 되기를 기대한다. 최원식 은희경 방현석 정홍수 김별아 강영숙 박혜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