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발적으로 신문 한 장도 사 읽는 법이 없어서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조차 전혀 알지 못했다. 꼭두각시처럼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 뜨는 기사만 수동적으로 클릭하거나, 아니면 자기가 좋아하는 기사만 취향대로 골라서 읽다 보니 그것이 오로지 그들이 아는 세상의 전부가 되었을 따름이었다. 타자의 숨겨진 사생활이나 파헤쳐 먹고사는 자들이 키보드를 두들겨 올리는 활자가 곧 이 세계의 실체라고 믿고 사는 붕어 인간들. 다소 과격한 이 비판에서 완전히 자유롭다고 생각할 이 시대의 네티즌들은 과연 몇 명이나 될까. 바로 이 음습한 토양에서 13회 세계문학상 대상을 수상한 도선우(46) 장편소설 ‘저스티스맨’(나무옆의자)의 연쇄살인마가 탄생했다. 피살자의 이마에는 탄환 구멍 두 개가 악마의 눈처럼 공통으로 뚫려 있었다. 피살자들의 공통점을 추리해내고 연계 관계를 그럴듯하게 밝힌 네티즌 ‘저스티스맨’이 아니었다면 경찰은 연쇄 살인의 고리마저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을 상황이었다. 어느 순간 네티즌들은 저스티스맨을 모시고 살인마를 ‘킬러’로 격상시키면서 급기야 영웅으로까지 추대하는 지경으로 치닫는다. 저스티스맨이 밝힌 피살자들의 공통점은 어설픈 ‘선’(善)을 빙자해 타인들을 다시는 헤어나올 수 없는 절망의 구렁텅이로 밀어넣는다는 점이다. 어설픈 ‘악’이 된 그들을 진짜 악이 나타나서 응징한다는 맥락이다. 이 피살자들은 어떤 죄를 지었을까. 살기 위해 발버둥치던 보험설계사가 회식 자리에서 만취한 채 길거리에서 택시를 잡다가 생리작용을 순리대로 해결하지 못해 화단에서 일을 저질렀는데 이 장면을 목격한 청년이 휴대전화로 촬영했고, 이 사진은 인터넷에 ‘뽀샵’처리되어 청정한 환경을 해치는 범죄자로 올라간다. 순식간에 ‘오물충’으로 낙인찍힌 이 사람은 한순간의 실수로 사회에서 매장되는 신세로 전락한다. 평범한 인간의 한순간 실수를 영원한 범죄로 만든 행위에 대한 응징을 첫 번째 피살자는 받은 것이라고 저스티스맨은 추리하고 분석한다. “이 정의 구현이란 개념은 뿌리치기 어려운 묘한 마력마저 있어 그것을 실천하는 과정에서 자신에게 해만 없다면, 솟구치는 성취 욕구를 자제하기가 쉽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타자를 심판대 위에 올려놓을 수 있다는 인간 본연의 의식하지 못하는 욕망을 바탕에 두고, 그것을 통해 자신의 위상까지 높일 수 있다는 거부할 수 없는 악의적 매력 때문에 누구도 쉽게 그 유혹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익명성 뒤에 숨어서 ‘정의 구현’이라는 마력에 빠져 한 사람의 인생을 끝장낼 수도 있다는 사실을 간과한 것이 피살자의 ‘범죄’ 행위였던 셈이다. 이어지는 피살자들의 사연도 크게 다르지 않다. ‘오물충’을 전 국민의 ‘오물’로 극대화시킨 인터넷 언론 기자를 비롯해 원조성매매 동영상을 올리고 그것을 퍼뜨린 이들까지 모두 연쇄살인의 희생양이 되어 간다. 경찰은 계속 미궁을 헤매고 그럴수록 ‘저스티스맨’의 인기는 높아지면서 급기야 저스티스맨을 회장으로 추앙하는 ‘우리들의 킬러’라는 인터넷 카페까지 만들어진다. “사람들은 가끔 자신이 살아온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삶을 혐오하며 자괴감을 느낄 때가 있는데, 그러한 자의식 과잉이 뒤틀린 욕망으로 발현되는 순간이 바로 부당함으로 피해를 본 타인의 삶을 목격했을 때라고 저스티스맨은 주장했다. …그것은 피해자일 것으로 추정되는 타자의 처지에 밑도 끝도 없이 분개하여 정의감처럼 느껴지는 감정을 불사르고, 그 감정의 정체를 미처 분간하기도 전에 일방적인 옹호를 칼날처럼 내세우며, 가해의 원인일 것으로 추측되는 대상을 무차별적으로 질타함으로써 자신의 자괴감을 희석하려는 자구책의 전형일 따름이라고, 비열함의 또 다른 얼굴일 뿐이라고 그는 모질게 평가했다.” 소설은 강력한 흡인력으로 이야기의 결말을 향해 질주한다. 과연 저스티스맨의 활약은 어디까지일까. 저스티스맨이 사라지게 되는 절정 부분에 이르면 독자들은 소설 속 네티즌들처럼 ‘맨붕’ 상태에 빠질지 모른다. 예상치 못한 급격한 반전이 독자들을 끝까지 몰아간다. 심사를 맡았던 김성곤(서울대 명예교수) 한국문학번역원장은 “최근 한국의 사회상을 추리소설 기법으로 비판한 빼어난 이 소설은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과 영화 ‘세븐’을 연상시킨다”면서 “위기의 시대에 작가는 과연 무엇을 써야 하는가를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최근 한국 문단이 거둔 커다란 수확”이라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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