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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계 치열한 생존경쟁 이야기 감칠맛 나게 그려
현역 소설가…10년 사회경험이 글쓰기 생생한 자산


"관념 아닌 '현실'의 목소리로 소통하고 싶다”

1억원 고료 세계문학상의 네 번째 주인공 이름은 ‘백영옥’이었다. 조카 이름을 필명으로 응모한 당선자의 본명이 최종 확인되는 순간 심사위원 중에는 기묘한 탄식을 내지르는 이도 있었다.

백영옥(34)은 이미 일간지에 ‘트렌드 샷’이란 칼럼을 3년째 연재하며 많은 독자들을 끌어모았지만 소설가로서는 2006년 ‘문학동네’ 신인상을 받으며 등단한 이후 ‘이게 다 노무현 때문이야’ 등 단편 4편을 발표한 신인이다. 하지만 그의 단편들은 소설집으로 묶이기도 전에 세간의 입소문에 오르내리며 유망 작가로 거론되고 있다. 세계문학상 당선은 그를 명실상부한 소설가이자 스타작가로 올려놓는 중요한 분수령이 될 것으로 보인다. 그는 지난달에 생애 첫 책으로 일간지 연재글 모음 산문집 ‘마놀로 블라닉 신고 산책하기’를 펴냈다.

“첫 책이 산문집이라 마음에 걸렸어요. 전 소설가인데, 이를 증명해줄 작품집이 없는 거예요. ‘소설가 백영옥’이라는 타이틀을 보면, 머쓱했지요. 세계문학상에 당선됐으니 이제 마음이 한결 가볍네요.”

당선작 ‘스타일’은 31세 패션 잡지 여기자가 풀어가는 이야기다. 패션계의 치열한 생존경쟁, 흥미진진한 사내 정치에 연애, 명품 이야기를 감칠맛 나게 엮었다. “나는 쇼핑한다, 고로 존재한다”를 거리낌 없이 말하는 당돌한 소설이다. 음식, 명품, 패션, 연애에 대해 떠드는 젊은 여성들의 수다를 엿듣는 것 같은 묘한 쾌감을 선사한다.

“제가 쓰고 싶은 건 번드르르한 트렌드가 아니라 현대 도시인들의 삶이에요. 칙릿이란 게 ‘된장녀’ 부류들만 나오는 가벼운 장르가 아니에요. ‘오만과 편견’을 쓴 제인 오스틴도 당대 여성의 삶을 솔직하게 그렸습니다. 딸을 시집보낼 때 노골적으로 신랑측 재산을 따지는 장면 등 세속적인 모습을 거침없이 드러내요.”

실제 백씨는 잡지사에 기자로 근무한 적이 있어 패션, 엔터테인먼트 산업에 밝다. 애초 잡지사에 칼럼만 기고하기로 계약했으나 감각과 작문실력이 눈에 띄어 기자로 채용됐다. 술, 영화 담당을 맡으면서 다양한 문화산업 현장을 근거리에서 접했다. 잡지사뿐 아니라 광고회사, 인터넷 서점에서도 일했다. 여러 직종에 몸담았던 체험은 그의 소설을 관념이 아닌 현실로 내려오게 하는 무게추가 되었다. ‘스타일’이 흥미롭고, 친숙한 에피소드로 가득 차 있는 이유다.

“전 문학의 숭고함만을 추구하진 않아요. 불멸의 작품을 남겨 길이 기억되길 원하지 않습니다. 물론, 문학을 위해 자기 삶을 희생하는 작가들은 존경해요. 하지만, 저는 자신이 자유롭고, 행복하기 위해 글을 써요. 소설가보다 드라마 작가를 낮춰보는 시선도 제겐 의아해요. 둘 다 훌륭한 소통수단이라고 생각해요.”

그의 문학관은 이미 확고히 정립돼 있었다. 글 쓰는 원칙도 군대 규율처럼 정해놨다고 한다. 그는 마치 사무실에서 업무를 보듯, 정해진 시간에 집중적으로 집필한다. 20대 초반 문청 때에는 그도 문학지상주의였지만, 10여년간 생활 전선에 부대끼는 새 가치관이 바뀌었다. 문예창작과에 입학한 이래 줄기차게 신춘문예에 응모했으나 계속 쓴맛을 봤다. 할 수 없이 그는 밥벌이를 해야 했다.

“응모한 신문사 신춘문예에 낙방하면, 굵은 글씨로 ‘신문사절’을 써 붙였어요. 매년 계속되니까, 더 이상 구독할 신문이 없더군요. 등단이 참 힘들었어요. 결국, 취업의 길로 방향을 틀었지만 포기나 전향은 아니었어요. 제가 일한 곳은 대부분 책 읽기, 글 쓰기와 관련이 있었거든요. 소설 쓰기에 큰 힘이 됐습니다. 또, 사회생활은 치열한 삶의 현장을 느끼게 했고, 저를 더욱 단단하게 단련시켰어요.”

소설쓰기는 그의 삶이자 천직이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장래희망란에 ‘소설가’라고 적은 이래, 다른 꿈을 품어본 적이 없다. 낙방의 비보를 접할 때마다 그는 “80세 이전에는 등단하겠지” 하면서 미래를 낙관했다. 그는 이제 짐짓 여유롭게 과거의 역경을 바라본다.

“신춘문예 실패는 당시 제 작품이 너무 자폐적이고, 이미지 과잉이 넘쳤기 때문이었어요. 사회생활을 하고, 많은 사람들과 교류하면서 소통의 중요성을 느꼈습니다. 소설가도 동시대인들과 적극 소통해야 해요. 그것이 돈을 주고 책을 사는 독자들에 대한 예의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