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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두리 인생’ 가득한 에메랄드 모텔
어느날 살인미수 용의자가 투숙하는데…


모텔이 밀집해 있는 어느 대도시 외곽 지역. 형형색색의 간판을 내건 모텔들 사이에 별로 크지 않은 규모의 에메랄드 모텔이 있다. 특이한 게 있다면 모텔 지붕에 아라비아 궁전을 모방해 만든 황금색 돔이 우뚝 솟은 점. 모텔 주인인 연희·상만 부부는 그 돔이 사랑에 몸살이 난 연인들을 사정없이 유혹해줄 것이라 믿었다. 세상이 당장 종말을 맞더라도 사람들이 하고 싶어 안달을 내는 유일한 게 있다면 남녀 간의 ‘그 짓’일 거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세상은 자꾸 달라진다. 무인시스템 장착에 실내장식을 호텔처럼 꾸며놓고 단골한테 할인 혜택 제공은 물론 마일리지 카드까지 발급해주는 최신식 모텔. 진화를 거듭하는 모텔들 속에서 에메랄드 모텔은 대중목욕탕에서 목욕을 끝낸 남자들이 대충 바르는 로션처럼 향기도, 특색도 없이 존재할 뿐이다.

어느 날 아침 모텔 입구의 오물을 치우던 연희는 선정을 발견한다. 언제부턴지 모르지만 하릴없이 모텔촌 일대를 배회하는 여자다. 남자 투숙객이 은밀하게 ‘여자’를 원할 때 선정은 아주 요긴한 존재다. 선정에겐 아픈 과거가 있다. 그녀가 남편 몰래 애인과 찾은 모텔에서 화재가 발생한다. 선정 혼자 간신히 도망치고 애인은 불에 타 죽는다. 그 충격으로 선정은 남편과 이혼하고 아이마저 잃는다.

에메랄드 모텔을 인수하기 전 연희·상만 부부는 작은 여인숙을 운영했다. 하루는 상만의 뚱뚱한 옛 아내가 여인숙을 찾아왔다. 상만은 원래 유부남이었다. 연희를 만난 뒤 아내를 버리고 둘이서 고향을 떠났다. 상만한테 앙심을 품었을 법도 한데 웬걸, 옛 아내는 자신이 운영하는 슈퍼마켓을 상만에게 준다는 유서를 남긴 채 여인숙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상만은 슈퍼마켓을 처분한 돈으로 연희와 함께 에메랄드 모텔을 인수한다.

어느 새벽 어린 여자 혜미와 배낭을 짊어진 청년 경석이 에메랄드 모텔을 찾아 장기투숙을 요청한다. 그들에게는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신생아가 있다. 산모의 지친 모습에 마음이 약해진 연희는 투숙을 허락한다. 얼마 뒤 살인미수 사건이 터진다. 경찰이 쫓는 용의자는 바로 경석. 둘이 급하게 도망친 객실은 버리고 간 물건과 쓰레기로 엉망이다.

언제부턴가 오후 2시만 되면 노인 커플 한 쌍이 모텔을 찾는다. 자식이 결혼을 반대해 잠시라도 함께할 곳을 찾는다는 할아버지·할머니를 보며 연희는 생전 처음 좋은 일을 하는 것 같은 환희를 맛본다. 하지만 둘의 사랑은 할아버지의 죽음으로 끝난다.

선정은 기어이 상만의 아이를 임신한다. 연희는 선정을 병원으로 데리고 가 강제로 낙태시킨다. 불행은 한꺼번에 닥친다. 은행 대출금 상환을 제때 못해 에메랄드 모텔은 경매에 넘어갈 위기에 처한다. 도망갔던 혜미가 아기를 업고 찾아온다. 혜미가 잠시 맡긴 아기를 재우던 연희는 잠이 든다. 꿈속에서 에메랄드 모텔이 삼풍백화점처럼 무너진다. 콘돔과 휴지, 생리혈이 묻은 시트, 재떨이가 머리 위로 쏟아진다.

잠에서 깬 연희는 혜미가 아이를 버렸음을 깨닫는다. 몇 번이나 아기를 데리고 보육원에 갔지만 결국 되돌아온다. 연희의 몸 깊은 곳에서 ‘내가 나를 포기하지 않으면 세상에서 나를 쓰러뜨릴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오기 같은 게 역류하듯 올라온다.